수십년간 종적 감췄던 이건희 기증 희귀 미술품들

50년간 못봤던 이중섭 '흰소'
월북이후 묘연했던 이쾌대 작품
이중섭 日 유학시절 은지화 3점
흙을 재료로 쓴 천경자 `만선`도
전문가들 "실물로 본건 처음"

강하늘 승인 2021.05.01 23:12 의견 0

삼성이 국공립 미술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중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희귀작이 상당수 포함돼 있어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전문가들조차 직접 본 적이 없다는 미술품이 많다. 

 

경북 칠곡 출신 화가 이쾌대(1913~1965년)는 1947년 성북회화연구소를 열어 '물방울 화백'인 김창열, 조각가 전뢰진 등 한국 대표 작가들을 가르쳤으나 6·25 막바지에 1953년 월북했다. 북한에 간 뒤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남한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지난주 대구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이쾌대 작가가 1960년에 그린 '항구'는 그 의문을 풀어줬다. 이 그림은 북한에서 용인된 사실주의 기법으로 석양에 물든 바다에 정박한 배들을 그린 풍경화다.

 

▲ 월북 화가 이쾌대가 1960년 북한에서 그린 '항구'.  삼성 제공

 

최은주 대구미술관장은 "서울에 있을 때의 작품과 화풍과는 많이 달라져 그의 생애 후반기 작품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당시 북한에서 사용된 유화물감 성분도 분석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월북 작가가 그린 그림이 어떻게 이건희 삼성 회장 손에 들어갔을까. 미술계는 북한에 있던 이쾌대 작품이 중국 판매상에게 넘어간 뒤 한국으로 들어와 이 회장에게 팔린 것으로 추정한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중섭(1916~1956년)의 '흰 소'는 지난 2016년 덕수궁에 전시했던 '이중섭: 백년의 신화'를 준비하던 학예연구사들이 애타게 찾았지만 종적을 알 수 없어 포기했던 작품이다.

 

▲ 이중섭의 작품 '흰 소'.

  

이는 1972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이중섭의 첫 유작전에 출품됐던 작품으로 1975년 '꽃 화가' 김종학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 이후 어디에 있는지를 찾을 수 없었다.

 

이중섭은 흰 소를 통해 작가의 내면을 표출해왔는데 이 작품 속의 흰 소는 저돌적이지 않으면서 아주 힘이 없는 상태도 아니다. 현존하는 이중섭 '흰 소' 연작은 5점 정도로 알려져 있다. '흰 소'와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황소'는 이중섭을 후원한 시인이자 사업가 김광균이 소장했던 작품이다.  

 

김환기(1913~1974년) 작품 중 가장 규모가 큰 1950년대 회화 '여인들과 항아리'(281×568㎝)는 1980년대 중앙일보 사옥에 걸렸다가 호암미술관 수장고에 들어간 후 밖에 나오지 않았던 작품이다.

 

가로 6m에 육박하는 벽화 같은 작품이어서 전시가 쉽지 않았으며 둘둘 말린 상태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화면 중앙에 김환기 작가 자신을 투영한 목이 긴 사슴이 당당하게 서 있다. 파리 유학 직전 자신감에 차 있을 때 심리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중앙일보 계열 잡지 '계간미술'에 근무했을 때 봤던 작품을 이번에 다시 보게 돼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증작인 이인성(1912~1950년)의 1949년 회화 '다알리아'는 1950년 사망 그의 직전 작품으로 가치가 높다. 장욱진(1917~1990년)의 그림 '나룻배'(1951) 뒷면에는 소녀가 그려져 있어 주목받고 있다. 6·25 중에 그림 재료가 부족해 양면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 이인성이 죽기 직전 그린 '다알리아'. 삼성 제공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된 이중섭의 1940년 은지화 3점도 희귀작으로 꼽힌다. 지금까지 미술학계에서는 이중섭이 1950년 6·25 이후 미군이 버린 양담배 은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게 정설이었으나 일본 유학 시절에도 은지화를 그렸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임종영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은지화를 시작한 시점이 달라지는 귀한 그림"이라며 "자료를 찾아보니 시인 고은이 쓴 '이중섭 평전'에 일본 유학 시절부터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은지화를 그렸다고 언급돼 있었다. 이중섭의 일본인 부인이 '도쿄에 살 때 남편이 나중에 살림이 피면 큰 작품으로 해보려고 은지화에 밑그림을 그렸다'고 증언한 자료도 찾았다"고 설명했다.  

 

전남도립미술관이 기증받은 천경자(1924~2015년)의 '꽃과 나비' '만선'은 1970년대 동양화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했던 작품이다.

 

흙에 물감을 섞어 종이 위에 바른 '만선'은 재료 질감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시중에 흔치 않은 천경자 그림이다. 이지호 전남도립미술관장은 "그동안 사진으로만 봤던 작품을 이번에 처음 보게 됐다"고 말했다. [플랫폼뉴스 강하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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