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선 협궤열차, 꼬마열차를 아십니까?

95년 12월 31일 폐선
꼬마열차를 추억하다

조용수 승인 2018.01.04 13:10 | 최종 수정 2021.10.21 23:11 의견 0

[플랫폼뉴스 조용수 기자] '장난감 기차가 칙칙 떠나간다. 과자와 설탕을 싣고서. 엄마 방에 있는 우리 아기한테 갖다 주러 갑니다'(장난감 기차 노래의 가사)

아이 어렸을 적, 거실에 플라스틱 레일을 깔고 장난감 기차를 운행(?)할 때 불러줬던 노래. 그때마다 떠오르던 꼬마 열차. 경기 수원역에서 처음 꼬맹이 기차를 보고 정말이지 저 작은 게 어떻게 기차 역할을 할까?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 수인선 협궤 열차.

▶ 꼬마열차를 추억하다 Ⅰ

때는 바야흐로 1980년대 중반, 꺾어진 쉰에 조금 더 보탠 시간을 산 남녀가 경기 수원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소래 철교를 지나 인천 소래포구까지 갔던 적이 있다. 파란 하늘과 맞춤 맞게 철로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분홍빛, 하얀빛 코스모스와 노란색 해바라기. 말로만 듣던 꼬마열차에서 흔들흔들, 하지만 마주앉은 앞 사람의 무릎이 부딪힐 정도는 아니었지 싶다.

그 남녀는 결혼해서 새끼 낳고 20여년을 그렇게 그렇게 살고 있다지 아마?

▲ 꼬마열차 수인선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기차는 작았지만, 그 안에 타고 있던 이들의 마음은 결코 작지 않았던, 아니 작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우주만큼 크고 넓게 보였다. 아, 더러는 그악스럽기도 했겠지만···.

아무튼 주단집 보자기나 이불 호청으로 쓰일만한 헝겊으로 덮개를 만들어 고무줄로 싸맨 빨간 고무 다라이-함지나 바구니란 단어보다 정감이 간다고 해서 사대주의의 잔재라 내몰지 마시길-에 새우젓이나 말린 생선 가득 담고 기차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젖히던 아주머니들. 삶이 버거웠음에도 내색하지 않던 우리 어머니들의 자화상이었다. 내게도 그런 어머니 모습이 남아 있을까? 남아 있기를···.

▲ 흰눈이 내린 협궤철로 위를 달리는 꼬마열차.

▶ 꼬마열차를 추억하다 Ⅱ

수인선 협궤열차는 1935년 착공, 1937년 8월 사유철도(私有鐵道)인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가 일제시대 수원에서 인천까지 운행하며 군자, 남동, 소래 등 염전지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운반하고 경기 지역에서 강탈한 물건들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부설했다.

광복 이후 사철 국유화 정책에 따라 교통부 철도국 소유로 변경, 1980년대에 들어서는 기존의 증기기관차에서 동차로 바뀌었으며 도로교통의 절전과 안산선의 개통으로 차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3년 11월, 인천~송도 구간의 협궤 여객 취급이 중단되고 표준궤로 바뀌어 화물 업무만 취급하게 됐으며, 1992년에는 송도~소래 구간이, 1994년에는 소래~한대 앞 구간이 폐선됐다. 1995년 12월 31일 폐선 직전까지 한국 유일의 협궤철도로 많은 관광객들의 관심을 받았던 협궤열차는 서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고달픈 삶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 증기기관차 시절의 수인선 협궤열차.

▶ 꼬마열차를 추억하다 Ⅲ

1990년 화성군 야목역 건널목에서였다지? 이 작은 기차가 소형 버스와 충돌했는데, 전복된 것은? 아이고, 버스가 아닌 기차였단다. 시쳇말로 기차의 굴욕이다. 운행 중 언덕을 만나 열차가 올라가지 못하면 손님들이 내려 밀거나 걸어야 했고, 눈이 조금이라도 쌓이는 날이면 미끄러져 탈선하기도 했다니···. 열차가 워낙 작아 생긴 웃지 못할 일이다.

마주 앉은 이의 얼굴에 있는 생채기까지 보일 정도로 좁은 객실, 서 있을라치면 열차의 흔들림에 따라 좌우로 앞뒤로 함께 움직이며 과자와 사탕 대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될 이것저것을 이고 지고 메고 일터로 향했을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그 덕에 재잘재잘 조잘조잘 대며 학교 다니던 멍게 얼굴에 까까머리 남학생들과 갈래머리 여학생들은 지금, 그만한 나이의 자식을 두었거나 아님 벌써 시집 장가보내고 서로 등 긁어주며 살고 있겠지? 그들의 기억 속에 비릿한 바다 내음 가득했던 꼬마열차는 또 어떤 추억으로 숨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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